끄적끄적/소설

장난감

유난히 스산하게 차가운 바람만 부는 어느 가을 날이었다.

어두컴컴하고 습하기 그지없는 다락방의 한 쪽 구석 모퉁이에는 언제부터인지 자리를 잡고선 먼지만 가득히 쌓여가는 커다란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감싸고 있는 먼지의 양을 보아하니 적어도 십 수 년은 그대로 방치된 것만 같아 보였다. 그 상자가 언제부터 다락방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가족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그 상자는 청년의 방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상자 안의 내용물은 청년의 것이라는 것뿐, 그 의외에는 가족들이 아는 것은 전혀 없었으며 또한 아무도 상자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았다.

다락방 깊숙한 곳에 있는 상자는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 시간 방치되어 있었다. 여태껏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상자는 지금까지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 다 된 청년의 다정한 손길에 의해 그 많던 먼지를 조금씩 떨쳐내고 있었다.

"후우- 무슨 먼지가 털어도 털어도 계속 있어"

한 차례의 자욱한 먼지바람이 청년의 얼굴을 강타했다. 순간 청년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재채기를 하였지만 청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이 계속해서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상자 위의 먼지를 터는 청년의 모습은 마치 프로그래밍 되어 반복적인 작업만을 행하는 로봇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먼지가 사라지자 청년은 상자를 들고 다락방을 나와 상자를 다락방으로부터 꺼내주었다. 청년의 생각 했던 것보다 상자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내용물이 빠진 빈 상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하였다. 하지만 상자를 품에 안고 걸을 때마다 상자 안에서 살짝살짝 들려오는 소리에 청년은 의심을 곧 떨쳐버렸다. 청년은 상자를 안은 채 그대로 집 밖으로 향하였다.

집 밖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유독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처연하고 살풍경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청년은 이내 상자를 차에 싣고서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지만 해가 벌써부터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는 붉으스럼한 기운들 때문에 더욱 호젓한 기분이 되는 것 같이 보였다. 청년은 감성적인 기분을 뒤로 하고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차가 속도를 낼 수록 차가운 공기는 더욱 더 청년을 감싸 안았다.

차를 몰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도심 외각에 있는 조그마한 소각장에 도착했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지어진 아주 작은 곳으로 청년이 어릴 때 한 번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뭔가 모르게 깨끗하게 정리 되어진듯한 아무도 없는 소각장은 고요에 젖어있는 폭풍전야의 교수대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청년은 차에서 나와 망설임 없이 상자를 꺼내 들고 걷기 시작했다. 상자를 들고 가는 청년의 표정에는 큰 변화는 없었지만 그 뒷모습은 조금 씁쓸해 보이는 듯 했다.

오랜만에 찾는 소각장의 모습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어도 전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처음에 왔을 적에는 소각장에서 풍기는 악취 등의 강렬한 모습에 압도되어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했지만 마냥 불이라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이상하게도 눈을 떼지 못하고 집중해서 보게 만들었던 경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청년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초라하며 지저분한 장소일 뿐이었다.

이미 불에 의해 형체가 사라진 잿더미들 앞에 이르러서야 청년은 상자를 내려놓고 그 속을 들여 보았다. 청년이 생각했던 대로 상자 속에는 청년과 어린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청년의 장난감들이 쌓여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상자 속에 있었는데도 장난감들의 상태는 하나 같이 좋지 못했다. 자잘한 먼지가 끼어있는 것은 당연하였고 한 때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듯 뽐내며 위풍을 드러냈던 로봇들은 어느새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심한 것들은 부식이 되어 버린 것인지 살짝 만지자마자 부러지기도 하였다. 부서진 장난감의 모습을 보면서 소년의 표정에는 변화가 생겼다. 분명 어린 시절이었다면 정말 누구도 못 말릴 정도로 서럽게 울었을 것을 생각하는 듯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과거의 감상에 빠진 것 같아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의 얼굴에는 그런 감상적인 모습은 일절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은 처음과 같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제는 필요하지 않은 상자 속의 장난감들을 하나하나 잿더미 위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장난감들이 잿더미 위로 자리하게 되었다. 한 때는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해 이름은 물론이고 별명까지 지어주고 혹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증표까지 새겨주었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던 말 못하는 친구였지만 이제 청년에게 있어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그저 한낱 장난감일 뿐이었다.

쌓인 장난감들을 보면서 청년은 성냥을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성냥을 꺼내든 청년은 평소와 다름없이 능숙한 모습으로 성냥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바로 장난감을 향해 집어 던져 버렸다. 청년이 던진 불씨는 서서히 그 몸집을 부풀려 커다란 불꽃이 되었고, 맹렬한 기세의 불꽃은 장난감들을 집어 삼키면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장난감들이 타면서 특유의 플라스틱이 타며 내는 악취가 나왔지만 청년은 자리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 보았다.

청년이 장난감들은 정리하는 것은 갑작스레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상자가 다락방으로 갈 때부터 금방 처리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가지 일이 겹치게 되면서 이제서야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청년에게 있어서는 계속해서 미뤄오던 숙제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불길에 녹아 내리는 장난감을 어째서 계속해서 바라보게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청년은 다시금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들고 입에 물었다.

"하아.."

청년의 입에서 짙은 담배 연기와 함께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인지 고뇌의 한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담배를 물고 나서야 청년은 불에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껏 맞아온 검은 매연과 함께 청년을 감싸는 퀘퀘한 악취 때문인지 어느새 소년의 눈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이 날은 이상하리만큼 시리도록 차가운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노을이 매우 아름다운 날이었다.


'끄적끄적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과 소녀  (0) 2015.12.11
,